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The Birth Of Korea
대한민국의 탄생)이 2024. 2. 1일
개봉 후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동맹 이후 뉴욕시민 환영
카퍼레이드 등 새로운 기록들이
알려지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들이 회자되고 있다.
우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수많은
외침(약 1천 회)을 당하는 과정에서
당파싸움 등과 같은 지도계층의 분열로
인한 백성의 고통과 국가적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이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정말 어떠한 사안에 대해 이념논쟁에
빠지지 않고 좌우익 또는 계파나 진영
논리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 역사관을
가짐으로써 한민족의 역사가 선순환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국민
모두 절실히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여러가지 공과가
이야기되고 서로 견해가 다르게 나타
나고 있지만 필자는 위와 같은 균형적
시각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몇 가지
공적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지만
분명 과오도 언급하고자 합니다.
1.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립
1945년 해방 이후는 세계사적으로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주의 국가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양립되면서 냉전시대가
도래해 한반도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심
했으며 북쪽에서는 소련 편에 서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김일성
세력이 태동했고 남쪽에서는 민족
주의를 바탕으로 남북 단일국가를
건립해야 한다는 지도자 등 좌우익
간 분열과 분쟁으로 해방 후 최대
혼란기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4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10년 일시 귀국했다가 1922년
다시 도미해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겪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
아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해
냄으로써 적화 야욕을 가진 공산세력
으로부터 남한을 지켜냈다고 본다.
* 좌익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민주주의를
말하고 성숙한 민주주의라고는 보지
않으며, 이는 4.19혁명 등 역사적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음
※ 해방 직후 우리 국민은 문맹률이
80%에 달하고 공산주의에 대해
거의 무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해방 후 지금까지 6. 25 남침 등 북한
공산주의가 일으킨 수많은 일들과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 볼 때
해방 후 혼란기는 한반도 전체가 공산
주의국가가 되느냐, 아니면 남한 만의
자유민주국가가 되느냐의 선택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는 것이 자명하다.
※ 그러나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대한
민국이 굳건한 국방 위에서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언젠가 통일에 대비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함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통해서
오늘날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선진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성이나 합리성을 벗어난
부작용 등 부정적인 문제들은 과오가
될 수 있는데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2.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을
통해서 북한 공산주의 세력이 남한을
공산주의화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시 드러났으며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지켜내기 위한
남한의 군사력 등이 얼마나
미흡한지가 입증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랜 미국생활 중
역량 등을 바탕으로 미군의 조기 참전
(남침 후 5일)과 UN 연합군의 참전을
이끌어 냈으며 휴전 반대와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1953년 6월 미군 지휘하에
있던 반공포로의 일방적인 석방
등으로 미국에 압력을 가하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미국에 휴전 후 북한의
재침에 대비한 강력한 군사동맹을 요구
하였고 미국은 한국에 방위조약을 약속
하여 1953. 10. 1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조인에 이르렀고 미국으로부터 8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받아 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당시 북한, 중국,
소련 등 공산국가로부터 자유민주
주의를 지켜내고 굳건한 한미 군사
동맹을 통해 지금까지 경제발전을
안정적으로 이룩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후 냉전 완화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와 자주국방의
필연성 등 새로운 외교국방 문제는
이와는 별개임).
3. 그 밖의 사항들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공적으로 1948년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제헌국회에서
반국가 활동을 규제할 목적으로 제정한
국가보안법, 6.25 전쟁 발발 직전에
토지개혁을 완료*하여 공산화 방지에
기여하고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
여성 참정권 도입 등이 알려져 있다.
* 토지개혁의 완료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며 농지개혁을 주장한 조봉암 농림
장관이 인기가 상승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암살된 것이나 친일청산
실패 등을 고려해 볼때 오히려
이견이 설득력을 갖고 있음
영화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야당후보가 급사해 3.15 부정선거를
할 필요도 없었으며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이는 이기붕이 주도했다는
자료도 나오고 시위로 부상당한 학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나왔다(이승만 대통령의 간접적인
책임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함).
끝으로, 지도자 누구나 공과가 있듯이
이승만 대통령도 업적 외에 친일청산
실패, 독재, 제주 4.3 및 보도연맹사건
양민 학살 등 많은 과오도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모든 지도자들의 기념관에는
사실을 바탕으로 공적 외에 과오도 같이
기록하고 전시하여 국민 모두가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봅니다.
※ 함께 생각해 볼 현대사 :
https://koeui.tistory.com/m/entry/
'역사 돋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 독립운동과 좌익사상에 대하여 (6) | 2024.09.01 |
---|---|
대한민국의 건국 또는 건국절에 대하여 (0) | 2024.08.19 |
영화 '박정희: 경제대국을 꿈꾼 남자' 그리고 객관적 역사관 (0) | 2024.07.29 |
'서울의 봄', 영화에서 역사를 배우고 교훈을 얻다 (2) | 2024.01.01 |
댓글